아직도 경로사상을 지지하는 글이 있는 것을 보고 한동안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예전부터 하고 있던 생각을 정리해 볼 기회가 온 것 같아서 글을 쓰고자 한다. (이 글은 [경로사상은 쓰레기통으로...] 글에 대한 반박이다. 인용은 모두 이 글에서 했다.)

‘웃어른에게 공경하라’ 같은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을 ‘경로사상’이란 말 대신 ‘연령주의’로 부르겠다. 연령주의는 나이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으로, 나이가 많다고 차별하는 것도 연령주의에 포함된다. 여기서 연령주의는 나이가 어리다고 차별하는 것만을 뜻한다.

1. 노인에 대한 비난은 그들이 노인이기 때문에 하면 안 되는가?
“최근 인터넷에서 접하는 문화 중 가장 충격적인 것은 바로 '개념없는 노인'들에 대한 비난들입니다. 한쪽 주장대로 이야기를 옮기면, 개념없는 노인네가 노약자석에 앉아 있는 임산부에게 욕을 한다거나, 아파 할 수 없이 경로우대석에 앉아 있는 학생을 야단친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올라오고 있고 거기에 엄청나게 열폭한 누리꾼들이 그 개념없는 노인네들을 비난하고 심지어 욕하고 있습니다.”

그가 노인이건 왕이건 간에 잘못했기에 비난하는 것인데 이걸 왜 문제 삼는가? 노인은 신성 불가침한 존재니 나쁜 짓을 하더라도 비난해선 안 되는가?

“제가 상경하여 대학다닐때 즈음 기저귀를 차고 돌아 다니던 아해들이 이제는 다 켰다고 인터넷상에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심지어 나이가 많은 상대방에 대한 비난도 모자라 그들 부모의 욕(예:가정교육이 안되었군!)도 서슴지 않는 세상입니다.”

만약 너무 도가 지나친 비난을 문제 삼는 거라면 이해한다. 그러나 그건 ‘노인’에게 지나친 비난을 한 게 잘못이 아니라, 나이에 상관없이 ‘사람’에게 지나친 비난을 한 게 잘못이다.

나이 많은 사람이 어린 사람에게 욕하면 그건 문제가 안 되는가? 나이 같은 사람끼리 욕하면 문제가 안 되는가? 나이가 어린 사람이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욕을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욕을 하는 게 문제인 것이다.

2. 내가 언젠간 나이 든다고 해서 나이 많은 사람을 공경해야 하는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늙어 가기 시작하는 동물인데 말입니다.”
“모든 사람은 늙는다. 당신도 사람이다. 따라서 당신도 언젠간 늙게 된다.”

글쓴이는 이런 말을 하면서 노인을 공경하라고 한다. 이것은 ‘당신이 늙으면 먼저 늙은 사람을 공경해야 한다’는 전제를 슬쩍 집어넣었는데, 왜 내가 늙는다고 나이 많은 사람을 공경해야 하는가? 이 말은 전제부터 증명해야 근거로서 효력이 있다.

내가 언젠간 죽는다고 죽어가는 사람을 공경해야 하는가? 난치병에 걸려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아이가 있으면 우리 모두 나중에 죽으니까 먼저 죽는 그 아이를 공경해야 하는가? 나도 늙으니 나이 많은 사람을 공경해야 하는 게 옳으면, 나도 죽으니 곧 죽을 사람을 공경해야 한다는 것도 옳다. 어떤 것을 나보다 먼저 한다고 그 사람을 공경하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3. 경험이 많으면 공경해야 하는가?
노인들은 경험이 많은 ‘인생선배’니까 공경해야 한다고 하는데 왜 경험 많은 사람을 공경해야 하는가? 그들의 의견이 타당하다면 경청(傾聽. 敬聽이 아님)하고, 반영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경청하고 반영하는 것과 공경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우리가 온라인 게임을 할 때 나보다 게임 경험이 많은 초등학생을 공경하는가? 그는 분명히 게임에서 나보다 훨씬 경험이 많다. 적어도 게임 내에서 우리가 게임을 하고 있다면 그는 나의 ‘게임선배’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공경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나보다 먼저 게임을 접해서 게임에 대해 아는 게 좀 더 많은 사람일 뿐이다. 그에게 조언을 구하기는 할지언정 공경하진 않을 것이다. 노인은 단지 나보다 먼저 인생을 접해서 인생에 대해 아는 게 좀 더 많은 사람일 뿐이다.

4. 노인에 대한 ‘배려’와 ‘공경’의 차이
단지 노인이란 이유로 공경하는 것은 반대하지만, 노인이란 이유로 배려하는 건 찬성한다. 어린이, 장애인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하듯 늙어서 기운 없는 노인들 역시 배려받고, 보호받아야 한다. 그러나 ‘공경’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얘기다.

어린이, 장애인을 배려해야 한다는 건 누구나 동의하지만, 어린이, 장애인을 어리니까, 장애가 있으니까 공경해야 한다는 건 동의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노인도 마찬가지다.

5. 연령주의의 해악
“'노인공경'과 '인생선배에 대한 존경'의 풍토가 '군 시절 구타행위'와 같이 사악한 문제가 아닐진대, 왜 우리는 전 세계 사람들이 고대부터 부러워하던 이 좋은 문화를 버려야만 하겠습니까?”

내가 연령주의를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게 엄청난 해악을 낳는다는 데 있다. 어른을 공경하라는 주장은 어른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한 모든 말을 막아버린다. “어른한테 말대꾸하지 마”는 전형적인 사례다. ‘공경해야 할 어른’에게 이런 것은 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 “어디 어른에게 감히!” 이 비합리적이고 무가치한 생각 때문에 아이들의 합리적인 사고방식에 제약이 생기고, 이런 방식에 익숙한 사람은 불합리에도 바로 순응하게 된다.

6. 나이 들면 이해할 수 있다?
“‘나이는 숫자놀음에 불과한 것이다’라는 개념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은 절대 충분한 경험과 연륜이 되기 전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를 주장하시는 님들도 십여 년 뒤면 아, 이 선배가 왜 이랬는지 알 수 있게 될 겁니다.”

나는 글쓴이가 잘못된 ‘논리’로 연령주의를 주장한 것을 반박한 것뿐이다. 애당초 논리적으로 설득할 수 없고, 나이가 들어야 이해할 수 있는 거라면 어설픈 ‘논리’로 설득하려고 하지 말고 아래 두 문장만 쓰면 될 일이지 대체 왜 그 긴 글을 썼는가. 아마 글쓴이 자신도 논리적으로 설득할 필요성을 느껴서 그랬을 것이다. 이는 글쓴이도 이 주장의 설득력이 부족함을 알고 있었다는 근거가 된다.

[경로사상은 지켜야 한다. 이해가 안 가는 사람은 나이가 들면 이해할 수 있다.]
정말 간단하고, 글쓴이의 생각을 이해하기 쉽지 않은가?

나이 들면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어른한테 말대꾸하지 마”와 더불어 앞 세대가 다음 세대와 말하다가 불리할 때 사용하는 오래된 수법이다. 이해는 나이가 들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만한 근거를 보고 하는 것이다. 그게 아니고 이해했다면 정말 이해한 게 아니라 이해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똑같이 소중하며, 존중받아야 할 존재다. 어리다고 무시하는 것도, 늙었다고 무시하는 것도 모두 잘못이다. 낡아 빠진 표현이긴 하지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시대착오적인 선착순 놀음은 이제 끝낼 때가 되었다.

,

최근 올라온 글

최근 달린 댓글

최근 엮인 글